후기 가야 연맹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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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3-0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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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예병(濊兵) 6,000을 보내 백제의 독산성(獨山城), 즉 마진성(馬津城, 예산군 예산읍)을 공격하였고, 이 전쟁은 신라의 신속한 참전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는데, 고구려측 포로가 “안라국 및 왜신관이 백제의 처벌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 전쟁이 발발했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백제는 가야 외곽 지역에 왜군 및 백제군을 배치하는 데 필요한 왜 및 가야 연맹의 협조를 확신할 수 없었고, 따라서 왜에 병사 파견을 중지하라고 요청했다.
왜는 백제의 의심에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백제는 왜 및 가야에 지속적으로 문물을 공급하고 인원을 파견함으로써, 그 대가로 가야 지역에 대한 기존의 세 가지 계책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후로는 가야 연맹의 어느 한 나라나 왜가 백제의 의사에 반대하여 행동하는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백제 성왕은 549년 및 550년 초에 걸쳐서 …(생략(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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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백제는 안라 및 왜신관의 소환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번번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라의 상층부는 백제에게 더 이상 대항할 계책이 궁해져 무력화되었다.후기가야연맹의멸망 , 후기 가야 연맹의 멸망기타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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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사비회의 결렬 이후에도 고구려에 대항하여 신라와 백제가 외형적으로 결속하는 국제 정세의 큰 구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후기 가야 연맹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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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대국가중 후기 가야 연맹의 멸망에 대하여 쓴 보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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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대국가중 후기 가야 연맹의 멸망에 대해서 쓴 보고서입니다. 결국 왜는 548년 1월에 병사를 보내줄 것을 약속했으며, 성왕의 세 가지 계책 가운데 하나가 왜와의 동조 아래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하여 안라국은 불안을 느꼈다. 백제 장군이 지휘하는 백제-왜 연합군이 안라 부근의 6성에 주둔하게 되면, 안라의 자주적 태세의 안정판 역할을 하는 안라왜신관에 백제의 압력이 강화되고, 이는 곧 안라국이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길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안라는 대항 체제를 다시 정비할 여유를 얻기 위하여 고구려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했다. 그에 대한 혐의를 벗기 위해, 약간의 사람을 보내 안라가 도망친 빈곳을 채우겠다고 자청했으며, 얼마 후 왜는 이나사와 마도가 몰래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을 따지겠다고 하여 백제 편을 들었다.